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의 진경산수화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의 서막을 연 이후 18세기는 진경산수화의 열풍이 조선 화단에 강하게 몰아쳤다. 수많은 문인묵객(文人墨客 – 먹을 가지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데 종사하는 사람)들이 한양과 금강산, 관동팔경과 단양팔경 등 전국 곳곳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우리의 산천을 대상으로 하는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유행했던 진경화풍의 이념적 근거였던 조선중화의식이 점차 반성과 비판에 직면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청나라 문화를 배우자는 북학(北學)이었다.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朴趾源)을 중심으로 한 북학파들은 더 이상 우리 것에만 매달려 있지 말고 밖으로 시선을 돌릴 것을 주장했다. 조선의 고유색을 핵심으로 했던 진경문화에 대한 재고와 반성이 제기되자 자연스럽게 100여 년 동안 절정을 구가했던 진경산수화는 점차 잔영(殘影; 뒤에 남은 흔적)을 남긴 채 사그라지게 되었다.
겉모습만 남은 진경
기야(箕埜) 이방운(李昉運, 1761-1815 이후)은 금강산, 관동팔경, 단양팔경 등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를 많이 그릴만큼 정선의 진경화풍에 깊이 공감했던 인물이다. 여기 보이는 [삼일포] 그림에서 그러한 진경의 전통을 계승한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다.
화면 한가운데 위치한 사선도(四仙島)를 중심으로 호수 주변에 여러 봉우리들을 배치하고, 이들을 모두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표현한 것은 전형적인 정선의 [삼일포] 화면 구성법이다. 그러나 필력의 수준과 진경을 이해하는 능력의 차이가 확연하다. 형식화된 나무의 표현과 화면에 등장한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이 중국풍이라는 점, 같은 모습의 배 두 척이 섬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식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 등은 모두 진경산수화풍이 경직되면서 형식화된 모습이다.
이러한 진경산수화풍의 형식화는 사대부 화가 김기서(金箕書, 1766-1822)의 단발령 그림에서도 확인된다. 단발령은 내금강의 전체 모습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라서 그림으로 그려지는 단골 소재였다. 김기서 역시 단발령에 오른 여행객과 그들이 바라보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화폭에 담았다.
전체적인 화면 구성이 정선의 단발령 그림들과 동일하다. 그러나 대상을 묘사하는 필력과 여러 세부적인 표현들에서는 많은 차이가 드러난다. 우선, 정선의 단발령 그림에서는 가까이 있는 단발령은 크게 그리고 멀리 있는 내금강은 작게 그려 화면의 깊이감을 표현하고 이를 통해 금강산의 웅장한 규모를 잘 보여주었지만, 이 그림에서는 근경과 원경의 차이가 거의 없어 다소 평면적인 느낌이 든다.
내금강 일만이천봉의 표현에서도 정선의 그림처럼 비로봉을 중심으로 펼쳐진 한 송이 연꽃 같은 모습이 아니라 수많은 바위 봉우리들이 들쑥날쑥한 모습으로 어지러이 서있는 듯하여 산만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보면 작가의 추상화 의도를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필력과 화법의 차이로 인한 미숙함은 감춰지지 않는다.
이렇듯 19세기 이후에도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은 그 명맥을 이어갔으나, 화법이 미숙하고 진경화풍의 구성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진경산수화가 단순히 필력과 반복되는 모사(摹寫; 베껴 그리기)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이념에 대한 철저한 공감이 있어야 가능한 것임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근대의 시간 속에서 구현된 진경산수화
조선왕조의 마지막 화원(畵員)과 초대 서화협회 회장을 역임했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은 19세기와 20세기 화단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전통과 변화의 두 흐름이 공존하던 시대를 살았던 그의 그림 안에는 진경화풍의 잔영과 새로운 변화의 모습이 함께 담겨 있다.
여기 보이는 그림은 1912년 정월 초하루 밤에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탑원(塔園)에 모여 '도소(屠蘇)'라는 술을 마시며 지난 한 해의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장수를 기원하던 문인묵객들의 모임 장면을 그린 것이다. 탑원은 종로3가역 부근 돈의동(敦義洞)에 살았던 오세창이 집에서 탑골공원의 원각사탑(圓覺寺塔)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으로, 이 탑원에 오세창과 안중식 외에 6명이 더 모였다.
특정한 인물과 시간, 장소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기록성과 기념성이 강한 그림이다. 안중식의 탁월한 그림 실력으로 진경화풍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이 그림에는 전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초하루 밤의 상서롭고 흥겨운 술자리를 강조하기 위해 멀리 보이는 원각사탑과 주변의 울창한 숲을 모두 밤안개와 어둠 속에 뿌옇게 흐려 놓았다. 주흥(酒興)이 도도한 누각은 마치 물안개에 잠긴 호수 위에 떠가는 배처럼 신비롭다. 마치 심사정에 의해 정립된 조선남종화의 영향을 보는 듯 한데, 등장인물들 역시 조선의 의복이 아닌 중국식 의복을 입고 있다. 더 이상 진경화풍의 근본이념인 조선중화주의가 시대이념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안중식의 진경화풍에 대한 변화된 이해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졌다.
안중식의 제자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 1897-1940)은 1918년 동경미술학교 일본화과에서 공부한 유학파이다. 그가 1923년 서울로 돌아온 후 30살 되던 1926년 2월 외금강의 명승인 만물상(萬物相)을 그린 두루마리 그림을 살펴보자.
일본 화풍과 서양 풍경화 구도를 토대로 한 그림을 주로 그리던 이한복의 20대때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우선, 금강산의 전체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표현하던 정선의 그림과 달리 이한복은 실제 눈에 보이는 풍경 그대로를 화폭에 그렸다. 그리고 짙은 먹과 묽은 먹으로 풍경의 차이를 두어 화면의 깊이감을 표현하는 전통 화법을 구사했지만, 수많은 화강암 봉우리들은 모두 뼈처럼 단단한 기운 없이 일률적이기만 할 뿐 단조롭고 무미건조하다. 18세기의 진경산수화와 판연히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20세기의 진경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이처럼 서양화의 구도와 일본화의 필묵법에 영향을 받은 진경산수화는 다음 세대의 산수화로도 일정 부분 계승되었다.
시대를 넘어선 진경의 정신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1899-1978)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과 함께 안중식 문하의 쌍벽으로 일컬어졌던 인물인데, 그의 그림에도 진경산수화의 전통이 살아 있다.
여기 보이는 그림은 1935년 여름 노수현이 고향 황해도 부근의 장수산(長壽山)에 있는 천불봉(千佛峰)을 그린 작품이다.
재령(載寧) 평야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멸악(滅惡) 산맥이 재령강 앞에서 갑자기 치솟으며 기암절벽을 이룬 장수산은 ‘황해(黃海)의 금강(金剛)’으로 불리는 명승이다. 특히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틈새가 발달한 흰색의 규암(硅岩)으로 이루어져 있어 산 전체가 기암괴석의 천태만상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참나무와 소나무의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농가 뒤편으로 웅장하게 솟은 천불봉의 자태가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촉촉하고 맑은 묵을 통해 수많은 가늘고 섬세한 붓질로 결이 많은 규암의 질감을 묘사한 후 짙은 먹으로 군데군데 적절히 심을 박아 암벽의 웅장한 높이와 거대한 질량감을 표현했다.
작가는 이 그림에서 손에 익은 전통 화법보다 눈에 비친 그대로의 풍경을 강조했다. 그 결과 화법에 의해 풍경의 표정과 느낌이 바뀌었던 전통적 진경산수화풍과 달리 실제 풍경을 눈앞에 보는 것 같은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실제의 풍경 위에 단순히 전통 화법을 얹어 놓거나 지나치게 필묵을 실경에 종속시켰던 이전과 달리, 실경과 필묵을 적절히 융합시켜 풍경의 멋과 필묵의 맛을 함께 살렸다. 스승으로부터 도제식으로 익힌 조선 말기의 화보풍 전통회화와 사생에 기반한 현대회화를 융합시켜 전통적인 정형산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던 노수현의 30대 시절 작품이다. 노수현은 1948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현대 한국 화단의 초석을 마련했기에, 진경산수화의 전통 역시 현대 한국 화단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우리 산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한 진경산수화는 조선후기 특정한 시기에 출현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품의 예술적 조형성이 다르게 나타났던 것은 그 진경의 정신을 이해하는 그 시대의 분위기와 그림을 그린 작가의 차이에 기인한다.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혼란한 지금 외래문화와 전통문화가 조화를 이루어 이 사회에 정착하려면 긴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때 외래문화의 짝이 될 수 있는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안목과 자긍심을 위해 진경산수화는 매우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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