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한국의 발견

조선말기 명기

날마다 추억 2017. 8. 26. 13:00
조선말기 명기
 

 



이난향(李蘭香)
1900년 평양 태생. 15살에 상경하여 조선권번에 입적.
하규일 선생의 수제자로 가장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았다.
이난향은 모든 노래를 두루 잘 부르는 명기로서 명성이 자자했으며,
용모도 단정하고 조행이 발랐다고 한다.
 
 
주옥경(朱鈺卿) 
기명은 산월. 1915년 21살 때 손병희 선생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
수의당(守義堂) 주옥경(1894∼1982)은 천도교 교조의 아내로,
천도교 여성회원들의 어머니로, 한국여성 운동의 선구자로 헌신적 삶을 살아간 인물이다.   

오소홍(吳小紅)
평양 기생. 조선권번에 입적되었다.
하규일 선생 밑에서 서도잡가와 장삼무를 익혔다.
원산홍, 김산호주 등과 함께 대선배격인 기생이다.
 
친필편지
 
김취홍(金翠紅)
운빈아미. 눈에 익고, 귀에 젖는다는 뜻으로 김취홍에
대한 묘사를 나타낸 말이다. 장구를 두드리며
춤을 췄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서도잡가에도 능했다.
얼굴이 아름답고 웃음이 매력적이어서 그녀의 웃음을 보면
없던 정이 절로 생겼다고 한다.
 
이진홍(李眞紅)
8살에 기생 서재에 입학. 갸름한 얼굴에 양 옆에
보조개가 있어 애교스런 모습이었다.
시조·가사·노래 등을 잘 불렀고 그 중에 가장 능란한 것은
평양에서 유명한 관산융마(關山戎馬)라는 서도잡가였다.
 
백운선(白雲仙)
본명은 순향. 그녀는 나이를 먹어도 춤과 노래가 변함이 없었고,
인기는 사라질 줄을 몰라서 만년 명기라고 불렸다.
하규일의 손에서 길러지면서 가장 귀여움을 받았다.
 
김산월(金山月)
유행가와 대중가요에 큰 영향을 끼쳤던 기생. 노래를 매우 잘 불렀다.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축음기판 음반을 취입했다.
이 음반에는 <장한몽가-原題는 金色夜叉> 라는 곡이 실려 있다.
 
 강명화(康明花)
본명은 강도천. 1900년에 평양 출생.
11세의 어린 나이에 기생이되고
17세에 서울로 상경하여 대정권번에 이름을 올렸다.
서도잡가와 시조를 잘했고 사교성이 좋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대구 부호의 아들 장병천과 사랑에 실패해 결국 자살하였다.
 
 
김영월(金映月)
장학선 등과 함께 대표적인 평양기생으로 소리에 능통했으며,
연기에서도 많은 활동을 펼친 기생이었다.
1927년 개봉한 영화 '낙양의 길'의 주인공이었다.
 
 
이옥란(李玉蘭)
한성권번에 적을 두고 있었으며 국악과 양악 양쪽에 모두 능했다.
특히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한 가요곡 ‘기생수첩’, ‘눈물의 시집’,
‘꽃같은 순정’ 등의 노래는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장연홍(張蓮紅) 
평양 기성권번 출신. 아름다운 용모와 자태로 평양에서부터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중국 유학길에 오른 이 후의 행적은 전해지는 바가 없다.
 
 
 
김화희(金花姬)
평양 출신. 용모가 단아했으며, 궁중연회에 자주 참가하였다고 전해진다.
대정권번에 적을 두고 있었으며, 시조, 서가, 잡가, 정재12종무에 능했다.
 
윤채선(尹彩善)
대정권번 출신의 예기. 잡기와 춤에 능했는데, 그 중 조선무용이 일품이었다.
얼굴이 아름다워 남성들에게 많은 구애를 받았다.
 
 
김옥엽(金玉葉)
초창기에는 궁중무용과 서도잡가와 경기잡가 그리고
30년대 중반부터는 가곡, 가사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특히 '수심가'는 워낙 뛰어나 당시 장안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문인 김동인과의 염문으로 유명하였다.
빅타, 콜럼비아, 태평 레코드 등에서 수십 장의 음반을 취입했다.
 
 
박녹주(朴綠珠) 
판소리의 명창. 1937년 창극좌에 입단.
1945년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
1970년 《흥부가》의 예능보유자로 변경, 지정되었다.
 
 
최섬홍(崔蟾紅)
평양 예기이자 서도소리의 명창. 기성권번에서 서도소리를 배웠다.
명창 김관운의 제자로 여류 명창에 속한다고 전해진다.
현재 명인명창선집 <수심가 걸작선> 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현계옥(玄桂玉)
경북 대구 태생. 일찍 부모를 여윈 탓에 17세가 되던 때에 대구 조합에 기적을 올리게 된다.
타고난 미모와 재주가 많았는데 춤과 가야금은 필적할만한 상대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현진건의 형인 현정건을 만나게 되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현정건이 죽은 후,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행동파 사상기생의 삶을 살았다.
 
 
김명옥(金明玉)
춤에 일가견이 있었던 기생으로 춘앵무가 특기였다.
가야금을 잘 키고 서도잡가로 유명했다.
다른 기생들에 비해서 일찍 기적(妓籍)에서 물러나
전라도 어떤 부호(富戶)와 함께 남은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김춘도(金春桃)
기명은 춘도(春桃). 9세 때부터 기성서재에서 가무를 연습.
20세세 이르러 거문고와 양금으로 평양에서 이름을 날렸다.
노래에도 뛰어나 수심가와 같은 곡조를 잘했다.
용모가 단정하고 순수한 태도를 보였다.
 
서명옥(徐明玉)
기명은 명옥. 평양 출신. 9살부터 기생학교에 입학.
가무음률을 배울 때 재주가 있고 총명하다고 했다.
소리는 시조, 노래, 수심가 그 외 잡가에 능했다.
입가의 웃음이 매력적이었다. 나이에 비해 조숙한 느낌을 들게 했다.
 
이춘홍(李春紅)
평양기생학교 출신. 미모에 재담과 넉살이 뛰어났고,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댄스를 잘 춘 기생이었다.
각 요릿집 손님들로부터 가장 많이 초청받아 당대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던 인물이었다.
 
유금도(柳錦桃)
이춘홍과 평양기술학교 동기생.
그녀는 미모에 있어서는 김옥엽과 이춘홍에 뒤졌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만남이 잦아지면, 한량들은 어느 누구 없이
김옥엽과 이춘홍보다는 유금도로를 찾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성으로서 숨겨진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현매홍(玄梅紅)
김옥엽과 같은 평양 기성권번 출신으로 가곡, 가사, 시조에 능통했다.
현매홍은 기생조합 최초의 잡지인 '장한' 편집인중 한명으로 활동했으며
일동축음기레코드 등에 그녀의 목소리가 전해온다.
 
 
오산월(吳山月)
산월이란 이름은 기생 중에 가장 흔한 이름 중 하나였다.
손병희 선생의 후처 주산월과 30년대 일세를 풍미한 소리꾼인 서도기생 김산월이 그들이다.
오산월의 특기는 알 수 없지만 빼어난 외모로 20~30년대 화보에 많이 등장하는 기생이었다.
 
  
기생(妓生)에 대한 오해와 진실명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소리내는 법을 익히기 위해 3, 4개월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연습했다.
교사가 맞춤소리의 맞춤법, 무릎 치는 방법 등을

일일이 시범을 보이며 가르치면 여학생들은 이를 따라 했다.

 

기생들의 관심사인 서비스 방법, 손님 다루는 방법은 ‘예의범절’과 ‘회화’ 시간에 가르쳤다.
걷는 법, 앉는 법, 인사법 , 술 따르는 법,
표정 짓는 법, 배웅하는 법 등
연회 좌석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다뤘다.

 

기생들은 남자의 마음을 끄는 기술에 관한 한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아는 재능이 있었다.

뛰어난 선배들이 모범을 보이고,

학교는 권번사무소와 긴밀히 연결돼 있었으며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기생 이야기뿐인 환경이었으므로

이 학교 상당수 학생은 겉과 속이 모두 기생다운 기생으로 양성되었다.

 

기생은 일제 강점기에도 시와 서에 능한 교양인, 문화의 계승자요 선도자 기능을 해 왔다.

기생의 왜곡된 이미지를 바로잡아야 하며 기생 문화 또한 복원될 필요성이 있다.



 

 
 
신현규
●1965년 서울 출생
● 중앙대 국어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고전문학)
● 現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
● 저서 및 논문 : ‘평양기생 왕수복,
 10대 가수여왕 되다’,
‘꽃을 잡고-일제강점기
기생인물생활사’, ‘고려조문인졸기’
(1998년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임병양란을
소재로 한 한문서사시연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