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100년 전 부석사모습 |
| | | ▲ 1960년대 영주 시가지 모습 |
| | | ▲ 1960년대 선거운동 |
1913년 풍기광복단은 대한광복회로 발전 1961년 대홍수는 영주발전의 획기적 대전기 경제가 살아나는 도시, 역동하는 도시로 도약 본지는 영주명명 100주년을 기념해 격동의 ‘영주 100년사’를 돌아보면서 다가올 ‘희망의 100년’을 기약해 본다. 1910년 경술국치(한·일 강제병합) 이후 1914년에 풍기군과 순흥군, 영천군(옛 영주지명)이 하나로 합쳐져 ‘영주군’으로 명명된 지 올해로 꼭 100년이 됐다. | | | ▲ 1916년 부석사 해체보수공사 당시 모습 |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통합 영주군(11개면)으로 개칭 국권을 약탈한 일제는 식민통지 중추 기관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1914년 3월1일 부령 제111호(1913.12.29)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통합 영주군(11개면)으로 개칭했다. 올해로부터 꼭 100년전의 일이다. 이 당시 면의 통폐합도 이루어져 영천군의 봉향면·망궐면·가흥면이 영주면으로, 두전면·호문면이 장수면으로, 적포면·권선면·진혈면(일부)이 문수면으로, 천상면·진혈면(일부)이 평은면으로, 산이면·어화면·말암면이 이산면으로 통합됐다. 일제는 1919년 각 면에 경찰관 주재소를 설치해 식민 통치 조직을 강화했다. | | | ▲ 1924년 영주공립보통학교 졸업사진 |
항일투쟁과 3·1 만세운동 을미의병으로부터 시작된 영주지역의 항일투쟁은 풍기광복단으로 이어졌다.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결성됐는데, 이를 계기로 영주인들의 항일투쟁은 전국적으로 그 활동 무대를 넓혀 나갔다. 풍기광복단은 대한광복회로 발전하면서 국내는 물론 국외 만주지역에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1919년 영주의 3·1만세운동은 3월21일 영주시장(영주초 앞 분수대 인근) 내 쌀시장과 어물시장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있었다. 그 후 4월4일 하리면 운산장터, 4월9일 풍기장터, 4월11일 장수면 호문리에서 전개됐으나 주동자들은 모두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 일제의 통치가 강화되는 가운데에도 우리 젊은 청년들은 지역별로 청년단체가 결성돼 학문 증진과 체육발전, 의사교환, 풍속교정 등에 역점을 두고 강습회, 토론회, 야학, 체육대회 등을 열어 민족정신의 맥을 이어나갔다. | | | ▲ 1930년 영주제일교회 찬양대 |
| | | ▲ 1931년 영주산업조합(금융기관), 태극당근처 |
강점기 교육과 농민운동 1920년을 전후해 1면 1교 정책으로 보통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해 영주, 풍기, 순흥에 보통 학교가 개교했다. 당시 인구에 비해 학교가 부족해 마을마다 글방과 야학이 성행하기도 했다. 1930년에는 군내에 7개의 보통학교가 생겼고 이산면 신암리와 풍기면 백동에는 야학이 설치되기도 했다. 1930년대 경북의 농민수는 전체의 85%였고 영주는 87%가 농민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농민들로 일제로부터 갖은 억압과 차별을 받고 지주로부터 고율의 소작료를 수탈 당해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이같은 가난은 197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이 때 농민들은 소작조합을 결성해 착취하는 일제와 싸웠다. | | | ▲ 1932년 풍기공립보통학교 졸업사진 |
| | | ▲ 1936년 영주공립보통학교 교직원 |
식민 억압의 1930-40년대 대륙 침략 전쟁을 본격화한 일제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 재배를 더욱 강화했다. 1938년 교육령 개정으로 식민교육을 강화하더니 1941년부터 국민학교로 개칭해 조선어 교육을 전면 폐지시키는 등 민족말살 정책이 극에 달한다. 일제는 1939년 미곡통제법과 1943년 식량관리령을 공포해 미곡의 공출량을 확대시키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는 등 전시 군량미 확보를 위해 온갖 강압적 수단을 동원했다. 이 때 우리 농민들은 풀뿌리로 연명하면서 가장 잔인한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1940년 11월1일 부령 제221호(1940.10.23)로 영주면이 영주읍으로 승격했다. 1943년 중앙선이 개통돼 철도 인근마을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됐고 교육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게 된다. | | | ▲ 1937년영주경찰서 가족 일동 |
| | | ▲ 1937년 단산면 경찰관 주재소 |
| | | ▲ 1938년 단산면 사천 농악대 |
해방 후 정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위력에 놀란 일본은 1945년 8월15일 무조건 항복하게 되고 우리는 35년 간 제국주의 학정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지도층의 좌우 분열 조짐과 함께 영주지역에서도 좌우익 단체가 결성돼 대립하고 혈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신탁통치반대운동이 있을 때 영주에서도 1천명 이상이 모여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였으며 이 운동은 면단위까지 확산됐다. | | | ▲ 1950년대 영교와 구성공원 |
| | | ▲ 1950년대 죽령고개주막 |
| | | ▲ 1953년 당시 학생들의 모습 |
| | | ▲ 1954년 영주채소시장 |
북한군은 7월14일 장갑차를 앞세우고 풍기 인근에 진지를 구축했다. 국군과 대치하며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증강된 북한군은 7월17일 야간공격을 감행함에 따라 국군은 영주 방어선을 지키지 못하고 안동으로 후퇴한다. 7월18일 영주를 완전 점령한 북한군은 이후 계속 남진하게 된다. 전쟁 중 학교는 모두 휴교했지만 일부학교는 피난학교를 운영 하는 등 피난지에서도 학업을 계속했다.6.25 전쟁과 영주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기습 공격했다. 당시 영주 사람은 3일뒤인 6월27일 쯤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고 한다. 7월10일 국군이 단양에서 죽령으로 후퇴하면서 피난 행렬이 남으로 남으로 이어졌다. | | | ▲ 1955년 봉송대와 쪽박소 |
| | | ▲ 1961년 영주수해(현 남서울예식장 인근) |
| | | ▲ 1963년 중앙통 선거유세(대동한의원 앞) |
영주 발전의 전기(轉機)마련 우리고장 영주는 1955년에 영암선(영동선)의 개통으로 교통의 요충지로 급부상하게 됐고 읍 인구는 약 2만 8천여 명으로 증가했다. 1961년 7월의 대홍수는 영주발전의 획기적 대 전기를 가져와 서천의 유로변경이란 역사가 이뤄져 신영주 시가지가 형성됐다. 1966년 경북선 개통으로 인구가 크게 유입돼 1968년에는 읍인구가 5만명을 초과하게 됐다. | | | ▲ 1960년 선거운동 모습 |
| | | ▲ 1960년대 영주역 모습 |
| | | ▲ 1963년 영보극장 옆(현 문화의 거리) |
| | | ▲ 1970년 원댕이 건널목(현 원당로 원마트 앞) |
| | | ▲ 1973년 가흥보트장(스케이트장) |
한편 대통령령 제6543호(1973.3.12)로 풍기면이 풍기읍으로 승격됐다. 1980년 4월1일 법률 제3188호(1979.12.28)로 영주읍이 영주시로 승격되면서 1읍 9면을 행정구역으로 한 영풍군이 분리됐다. 영주시·영풍군은 분리된 지 15년 만에 다시 도농복합형시설치에관한법률 제4774호(1994.8.3)에 의거 1995년 1월1일 1읍 9면 13동을 행정구역으로 통합돼 영주시로 새롭게 발족했다. 2014년 민선 6기를 맞이한 영주시는 경제가 살아나는 도시, 힐링의 중심도시, 역동하는 도시로 ‘희망의 100년’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