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의 변천사
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이
28일 영국국립문서보관서(National Archives)에서 확인, 발굴한
최초의 태극기 원형을 공개하면서 태극기의 변천과정에 대해 강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최초의 태극기는 지금으로부터
126년전인 1882년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한
태극기의 원형을 그대로 그린 것으로 크기는 가로가 142.41㎝,
세로는 115.14㎝, 태극의 지름은 81.81㎝로 되어 있습니다.
▶ 최초 태극기 모양
▶ 독립신문 제호 태극기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최초의 의사였던 서재필 박사에 의해 1898년 7월 1일부터
발간된 독립신문 제호에 실린 태극기.
당시 독립신문의 제호 태극기는 발행될 때마다 그 모양이 달랐는데,
아마도 태극기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괘의 위치도 지금과는 아주 다르다.
▶ 항일독립운동태극기
1900년 무렵의 태극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를 단호히 저항하면서
굳건히 항일운동을 펴자는 글을 태극기 양쪽에 새겨진 항일 독립운동 태극기.
일본은 이 태극기를 빼앗아 갔다가 1967년에 반환하였다.
▶ 불원복 태극기
전남 구례군의 고광순(1848∼1907) 의병대장이
항일운동을 하면서 사용한 태극기이다. 태극기 위에 "불원복(不遠復)" 즉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라고 써 넣은 글씨에서 알수 있듯이
항일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 평양숭실학교 항일운동 태극기
1919년 3월 1일 정오에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시간을 맞추어 평양의 숭실학교 학생 김건은 동료 학생들과
이 태극기를 만들어 학교 게양대에 높이 게양하므로써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있음을 알렸다. <독립기념관 보관 전시>
▶ 목판태극기
1919년 3월 1일 항일운동 시위 때 대량으로 태극기를 나누어주기 위해
만든 목판 태극기. 이 목판을 이용해 짧은 시간에 찍어낸 수천장의 태극기는
어느새 목이 터져라 외치는 "독립만세" 항일군중으로 변하였다.
<독립기념관에서 보관 전시>
▶ 독립군 진군기
1920년대 독립군이 시용하던 독립진군기 독립군들은
이 태극기를 앞세우며 우렁찬 나팔을 불면서 독립의 그날을 위해
너나 가리지 않고 굶주림마저 잊은채 피나는 훈련을 받았다.
▶ 김구선생 서명 태극기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안창호 부인 이혜련에게 보낸 친필 태극기.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과 인력과 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 강노말세(强弩末勢)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광복을 완성하자"라는 글귀가 보인다.
▶ 광복군 서명 태극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고
대한민국이 해방되었다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함성을 높이 외치며
그동안 항일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던 태극기에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서명하였다.
▶ 학도병 통일 맹세 태극기
1950년 6월 25일 김일성 정권이 남침하므로써 한반도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불과 5년만에 동포끼리 전쟁을 해야만 하는 비극을 남겼다.
이때 3차 학도병을 지원한 병사들이 부산주둔 육군부대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맹세를 태극기에 빽빽하게 남겼다.
▶ 현재의 태극기
1945년 8월 15일 해방이되었으나,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48년에서야
대한민국 헌법이 탄생되고, 그 이듬해인 1949년 10월 15일
현재와 같은 태극기를 문교부고시로 탄생시켰다.
<자료출처: 태극기연구가 송명호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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